기술의 파도와 합병의 태풍, 토파스와 아시아나세이버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이라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변화는 수십 년간 항공권 유통 시장을 지배해온 두 자회사, 토파스와 아시아나세이버를 운명의 기로에 세웠죠. 모기업의 보호 아래 안주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기술 혁명의 파도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생존해야 할지, 그 미래의 세 가지 시나리오를 심층적으로 분석해보겠습니다.

과거의 영광: 보호무역 아래 번성한 공생적 종속 모델
토파스와 아시아나세이버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이들의 탄생 배경과 독특한 수익 구조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공생과 종속의 이중주
이들은 각자의 항공사 모기업과 글로벌 기술 파트너 사이의 합작으로 탄생한, 전형적인 '공생적 종속 모델'이었습니다.
토파스여행정보 (Topas): 1987년 한진정보통신의 사업부로 시작해 1999년 독립 법인으로 출범했습니다. 대한항공의 모기업인 한진칼이 지분 94.4%를, 글로벌 GDS(Global Distribution System) 1위 기업 아마데우스가 나머지를 보유한 합작사입니다.

아시아나세이버 (Asiana Sabre): 1991년 아시아나항공과 Sabre(세이버)의 아시아 지역 GDS 연합 '애바카스'가 공동 출자해 '아시아나애바카스'로 설립되었습니다. 애바카스는 세이버와 아시아 각국의 대표 항공사가 출자하여 설립한 세이버의 아시아 운영 자회사 였습니다. 이후 2015년 세이버가 애바카스의 개별 항공사의 지분을 인수하며 현재의 사명으로 변경했습니다. 지분 구조는 아시아나항공이 80%, 세이버 아시아태평양 법인(구 애바카스)이 20%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수익은 항공사에서, 점유율은 인센티브로: GDS의 수익 모델
이들의 수익 모델은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수익원은 항공사에서 나왔습니다. 여행사가 GDS를 통해 항공권 한 구간(Segment)을 예약할 때마다 해당 항공사로부터 일정액의 예약 수수료(Booking Segment Fees)를 받았습니다. 이 수수료는 GDS 매출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여행사와의 관계에서는 시스템 사용료를 받기보다, 오히려 예약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장려금)'를 지급하며 자사 GDS의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핵심 경쟁 수단이었습니다. 특히 2010년 대한항공을 시작으로 항공사들이 여행사에 지급하던 발권 대행 수수료(Commission)를 폐지하면서, GDS가 제공하는 인센티브는 여행사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수입원이 되었고 GDS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보호주의가 낳은 안주와 혁신의 부재
결론적으로 두 기업의 과거 재무적 성공은 기술 혁신이나 치열한 경쟁의 산물이 아니라, 모기업의 시장 지배력을 바탕으로 한 '보호주의적' 독과점 구조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실제로 아시아나항공은 자사 GDS의 이용률을 높여 자회사 수익을 보장하고 자사의 GDS 수수료 비용은 절감하려는 목적으로 여행사들에 아시아나세이버 시스템 사용을 사실상 강제했습니다. 이러한 불공정 행위는 2019년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온실 속 성장'은 필연적으로 안주를 낳았습니다. 보장된 수익 구조하에서는 파괴적인 혁신을 추구할 유인이 약해졌고, 최우선 과제는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닌, 모기업 및 여행사 네트워크와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사적 배경은 보호막이 사라진 지금, 이들이 왜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거대한 파괴자, NDC의 등장
이러한 안정적인 구조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바로 국제항공운송협회(IATA)가 주도하는 NDC(New Distribution Capability)입니다. NDC는 특정 시스템이 아닌, 항공권 유통을 위한 새로운 데이터 전송 표준, 즉 '통신 규약'입니다.

과거 GDS가 사용하던 1980년대의 텍스트 기반 표준(EDIFACT)은 다양한 상품 정보를 담기에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반면 NDC는 유연한 XML 기술을 기반으로,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리치 콘텐츠(Rich Content)' 전송이 가능해 항공권과 부가 서비스를 결합한 다채로운 상품 구성이 가능합니다. 이를 통해 항공사는 추가 수하물, 라운지 이용권, 기내식, Wi-Fi 등을 결합한 맞춤형 상품을 직접 '오퍼'하고 관리하는 '디지털 소매업자(Digital Retailer)'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항공사들이 NDC를 절박하게 추진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GDS에 지불하는 막대한 유통 비용을 절감하고, 유통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함입니다. 독일 루프트한자 그룹은 2015년부터 GDS를 통해 발권되는 항공권에 16유로의 '유통 비용 할증료(DCC)'를 부과하며 여행사들의 NDC 채널 전환을 압박했습니다.
이는 GDS의 역할을 '문지기'에서 항공사의 NDC 콘텐츠와 기존 GDS 콘텐츠를 함께 제공하는 '통합 제공자(Aggregator)'로 바꾸고 있습니다. 아마데우스의 'NDC [X]' 프로그램과 세이버의 NDC 솔루션 개발은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려는 필사적인 방어 전략인 셈입니다.
하나의 하늘, 두 개의 시스템: 합병 이후의 운명 시나리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로 하나의 항공사가 경쟁 관계인 아마데우스, 세이버와 각각 제휴한 두 개의 자회사를 소유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 비효율을 해결하기 위한 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시나리오 A: 불안한 독립 경쟁 (공식 발표안)
대한항공이 독과점 심화에 대한 규제 당국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제출한 공식 계획은 두 회사를 독립 법인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중복되는 관리 인력과 마케팅 비용, 아마데우스와 세이버라는 상이한 기술 로드맵에 대한 이중 투자 등 근본적인 비효율을 방치하는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시나리오 B: 재앙을 각오한 시스템 통합 (효율성 극대화)
두 회사를 하나로 합치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장 효율적입니다. 그러나 이는 아마데우스와 세이버 중 하나를 버려야 함을 의미하며, 아시아 핵심 시장의 최대 고객사를 잃게 될 GDS 파트너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올 것입니다. 유나이티드-콘티넨탈, 아메리칸-US에어웨이즈 등 해외 대형 항공사 합병 사례에서 보듯, 예약 시스템 통합 실패는 판매 채널 마비라는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가장 큰 리스크입니다.
시나리오 C: 새로운 기술로의 도약 (전략적 혁신)
낡은 시스템의 통합 대신, NDC를 기회로 삼아 통합 대한항공이 독자적인 차세대 유통 플랫폼을 직접 구축하는 '립프로그(Leapfrog)' 전략입니다.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지만, 성공할 경우 GDS 비용 절감, 완전한 유통 통제권 확보, 그리고 두 글로벌 파트너에 대한 기술적 종속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가장 큰 과실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이 과정에서 토파스와 아시아나세이버는 이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하고 관리하는 조직으로 재편될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의 충돌: 3자간의 복잡한 협상 구도
결론적으로 토파스와 아시아나세이버의 최종 운명은 대한항공 단독이 아닌, 통합 대한항공, 아마데우스, 세이버라는 3자간의 복잡한 전략적 협상의 결과물이 될 것입니다.
통합 대한항공의 목표: 유통 비용 최소화와 운영 효율성 극대화. 단일 시스템으로의 통합(시나리오 B 또는 C)을 지향합니다.
아마데우스의 목표: 기존 대한항공 비즈니스를 지키고, 아시아나항공의 물량까지 흡수하는 것. 세이버로의 전환을 결사적으로 막으려 할 것입니다.
세이버의 목표: 기존 아시아나항공 비즈니스를 지키고, 대한항공의 물량까지 흡수하는 것. 아마데우스로의 전환을 결사적으로 막으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관계의 충돌은 전략적 교착 상태를 만듭니다. 레거시 시스템의 완전 통합(시나리오 B)은 정치적으로 매우 어렵고, 현상 유지(시나리오 A)는 재무적으로 비효율적이기에, 장기적으로는 통합 대한항공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기술적 도약'(시나리오 C) 전략이 가장 매력적인 대안으로 부상할 수 있습니다.
통합 과정의 항해: 기대 시너지와 내재된 리스크
통합 과정은 막대한 기회와 위협을 동시에 안고 있습니다.
기대 시너지
비용 절감: 하나의 GDS 자회사 인프라를 제거할 경우 운영비, IT 계약, 인건비 등에서 막대한 비용 절감이 가능합니다.
IT 및 데이터 통합: 운항통제센터(OCC)와 같은 핵심 IT 시스템의 통합은 운항 안전성 및 자원 배분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협상력 증대: 세계 10위권의 거대 항공사로 거듭남으로써, 향후 기술 파트너와의 협상에서 훨씬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습니다.
내재된 리스크
시스템 통합 실패: IT 시스템 이전의 실패는 판매 채널 마비와 고객 신뢰 상실이라는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가장 큰 리스크입니다.
인력 통합의 난제: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없다"는 강조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다른 기업 문화와 중복 인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조직 내 갈등과 사기 저하는 피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고객(여행사) 이탈: 시스템 변경 과정의 혼란은 수많은 여행사들의 업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통합 초기 단계의 매출 감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론: 가장 가능성 높은 미래의 경로
단기적(1~3년)으로는 규제 문제를 회피하고 고위험 결정을 연기할 수 있는 '시나리오 A: 독립 경쟁 체제 유지'가 현실적인 경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중장기적(3년 이후)으로 두 시스템을 유지하는 비효율성은 결국 한계에 봉착할 것입니다. 이때 시스템 통합의 막대한 리스크(시나리오 B)를 고려하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시나리오 C: NDC 기반 플랫폼 구축'으로 점진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최종적으로 통합 대한항공은 자체 NDC 채널 개발에 투자를 시작하고, 이 채널을 통해서만 제공되는 독점 콘텐츠(특가, 부가 서비스 번들 등)와 더 나은 가격을 제공하여 여행사들의 연결을 유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과정에서 토파스와 아시아나세이버는 각자의 여행사 네트워크가 새로운 NDC 채널에 연결되도록 지원하는 '전환 관리자' 및 '애그리게이터'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대한항공의 직접 NDC 채널이 유통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 레거시 GDS 지원 업무는 하나의 플랫폼으로 통합되거나 단계적으로 폐지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기업의 보호 아래 안주하던 독과점의 시대는 명백히 끝났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경쟁력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과제 앞에 선 이들이 어떤 혁신을 통해 새로운 하늘의 설계자로 거듭날 수 있을지, 그들의 행보가 주목됩니다.
주요 출처 목록
-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나무위키): 합병의 전체적인 과정과 배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https://namu.wiki/w/대한항공의%20아시아나항공%20인수
- 아시아나세이버 - 위키백과: 아시아나세이버의 설립, 지분 구조, 연혁 등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합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아시아나세이버
- 토파스여행정보(주) 기업정보 (사람인): 토파스여행정보의 기본적인 기업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saramin.co.kr/zf_user/company-info/view/csn/TVUrRHRneDhnbi9IRTRnRnp4T2xyQT09/company_nm/토파스여행정보(주)
- [단독] '우리 발권시스템만 써' 아시아나, 공정위 제재…대한항공은요? (비즈한국): GDS의 캡티브 마켓 전략과 공정위 제재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룬 기사입니다. https://www.bizhankook.com/bk/article/17601
- Distribution with Offers and Orders (NDC) Factsheet (IATA): NDC의 개념과 목표에 대한 국제항공운송협회의 공식 자료입니다. https://www.iata.org/en/iata-repository/pressroom/fact-sheets/fact-sheet-ndc/
- [양박사의 NDC 이야기] IATA의 NDC 구상③_NDC와 GDS의 차이 (여행신문): 전통적인 GDS와 NDC의 기술적, 구조적 차이점을 설명하는 전문가 기사입니다. https://www.travel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4467
- 항공산업, 'NDC'에 주목 GDS 비용 줄이고 직판 확대에 도움 (세계여행신문): 항공사들이 왜 NDC를 도입하려 하는지에 대한 동기를 분석한 기사입니다. https://gtn.co.kr/mobile/news_view.asp?news_seq=75466
- GDSs: Amadeus vs Sabre vs Travelport (AltexSoft): 글로벌 GDS 시장의 3대 플레이어에 대해 분석한 영문 자료입니다. https://www.altexsoft.com/blog/travelport-vs-amadeus-vs-sabre-gds/
- 대한항공·아시아나 합병 종결 눈앞…'완전한 통합'까진 어떻게 (연합뉴스): 합병 이후 자회사 통합 과정의 과제를 다룬 기사입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41128161200003
- "대한민국 하늘 더 안전해진다"…대한항공 최첨단 운항통제시스템 공유하고 통합 시너지 극대화 (중앙일보): 합병 이후 IT 시스템 통합의 시너지 효과에 대한 기사입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1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