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여행 앱은 죽었다: 이제 '돈맥(Money Flow)'을 뚫는 자들만 살아남는다

지난 10년, 여행 산업은 거대한 '앱의 시대'를 건너왔습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 예쁜 UI, 최저가 항공권 알림, 감성적인 숙소 사진들... 투자자들은 "일단 유저부터 모아와! 수익 모델은 나중에!"라고 외쳤고, 스타트업들은 적자를 감수하며 덩치를 불렸습니다.

화려한 여행 앱은 죽었다: 이제 '돈맥(Money Flow)'을 뚫는 자들만 살아남는다

하지만 2025년 오늘, 그 화려한 파티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최근 글로벌 여행 테크(Travel Tech) 시장의 흐름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저는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혁신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프론트엔드(Front-end)'가 아니라, '돈이 흐르는 보이지 않는 길(Back-end)'을 장악하는 작업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짜 돈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의 구조를 쥔 사람들에게로 흐르고 있습니다.


1. 여행사가 아니라 '핀테크 기업'입니다만?

여행 산업의 가장 큰 비효율은 예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자금의 흐름'에 있습니다. 이 지점을 파고든 기업들은 자신들을 여행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트라발라(Travala.com)입니다. 겉보기엔 평범한 OTA(Online Travel Agency) 같죠? 하지만 이곳의 거래 데이터를 뜯어보면 아주 기이한 현상이 목격됩니다. 전체 예약의 무려 78~80%가 암호화폐로 결제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본 트라발라의 진짜 무서운 점은 '로열티 프로그램의 자산화'입니다. 기존 여행사들이 소멸 시효가 있는 마일리지를 '부채'로 쌓아둘 때, 트라발라는 고객들에게 자사 토큰(AVA)을 사서 '락업(Lock-up)'을 걸게 만들었습니다. 고객은 할인을 받기 위해 돈을 쓰는 게 아니라, 투자를 하는 셈이죠.

결과적으로 그들은 일반 여행자보다 3배나 더 많은 돈을 쓰는 '크립토 부유층(Crypto-affluent)'을 핀셋으로 골라내, 충성도 높은 커뮤니티를 구축했습니다. 이건 마케팅의 승리가 아니라, 금융 설계의 승리입니다.

기업 출장 시장의 공룡이 된 나반(Navan)의 행보도 충격적입니다. (구 TripActions) 이 회사의 재무제표를 분석해 보면, 여행사라기보다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기업에 가깝습니다. 매출의 90%가 단순 예약 수수료가 아닌 '시스템 사용량'에서 나오니까요. 나반의 킬러 콘텐츠는 '나반 커넥트'입니다.

기업이 쓰던 법인카드를 교체할 필요 없이, 나반의 소프트웨어만 얹으면(Overlay) 전 세계 어디서 긁든 경비 처리가 자동화됩니다. 덕분에 이 회사의 총마진율(Gross Margin)은 인건비 비중이 높은 여행업계에서 기적에 가까운 71%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CFO들이 이 서비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2. AI: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의 땅'에 착륙하다

"AI가 당신의 꿈같은 여행 일정을 1초 만에 짜줍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문구가 유행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물어봅시다. 당신은 AI가 짜준 낯선 일정표를 보고 바로 수백만 원을 결제하나요? 아닐 겁니다. 결국 예약은 익숙한 익스피디아나 스카이스캐너로 돌아가죠.

이 '수익화의 벽'을 깨달은 기업들은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습니다.

마인트립(Mindtrip)이 대표적입니다. 초기엔 B2C 챗봇으로 시작했지만, 최근엔 관광청이나 여행 미디어 기업에 AI 기술을 빌려주는 B2B 모델로 과감히 피벗(Pivot)했습니다. 제가 주목한 기능은 '스타트 애니웨어(Start Anywhere)'입니다. 인스타그램 스크린샷, 유튜브 링크, 텍스트 메모 등 흩어진 정보를 던져주면 AI가 그걸 분석해 실행 가능한 일정으로 바꿔줍니다. "영감은 무료지만, 실행은 돈이 든다"는 비즈니스의 진리를 간파하고, 기업들의 '운영체제(OS)'가 되기를 자처한 겁니다.

반면, B2C의 끈을 놓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레일라(Layla)입니다. 이들은 아예 인스타그램 DM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릴스를 보다가 "여기 어디야?" 싶을 때, 앱을 켤 필요 없이 바로 DM으로 물어보고 예약까지 끝내는 구조입니다. 메타(Meta)와 같은 거대 플랫폼에 종속될 위험은 있지만, '발견'과 '구매' 사이의 시간을 0초로 줄이려는 시도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부킹닷컴 창업자들이 왜 여기에 투자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3. 인간의 욕망을 해킹하는 ESG 전략

기업들이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건 이제 도덕이 아니라 '법적 의무(CSRD 등)'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지구를 위해 불편한 기차를 타세요"라고 강요하면 먹힐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에코미오(Eco.mio)는 이 지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아주 영리하게 파고들었습니다. 그들은 도덕심에 호소하는 대신, 탐욕(?)을 건드립니다.

"김 대리님, 이번 출장에서 비즈니스석 대신 기차를 타면 회사는 50만 원을 아낍니다. 그중 20만 원을 김 대리님 보너스로 드릴게요. 어때요?"

이 간단한 '넛지(Nudge)'가 가져온 변화는 놀랍습니다. 데이터에 따르면 친환경 옵션이 90%의 확률로 더 저렴하다고 합니다. 기업은 비용과 탄소를 동시에 줄이고, 직원은 현금 보상이나 기부금을 챙깁니다. 행동경제학을 B2B 소프트웨어에 녹여내어 '참아야 하는 ESG'를 '돈 버는 ESG'로 바꾼 것, 이것이 진짜 혁신 아닐까요?


4. 2026년의 유니콘은 '국가'를 대체한다

마지막으로 주목하는 흐름은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인프라입니다. 노트북 하나 들고 발리로, 리스본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예쁜 숙소? 아닙니다. 바로 '사회 안전망'입니다.

세이프티윙(SafetyWing)은 스스로를 보험사가 아니라 '인터넷 위의 국가'라고 정의합니다. 거주지 기반의 기존 보험사들이 해주지 못하는 국경 없는 의료 보험을 제공하면서, 이들은 전 세계 원격 근무자들의 필수재가 되었습니다. 연 매출 2,100만 달러를 넘기며 성장 중인 이들의 야망은 단순한 보험 판매가 아닙니다. 향후 연금, 나아가 '디지털 여권' 기능까지 제공하며 국가의 기능을 민간 차원에서 대체하겠다는 겁니다.

호텔 유통 구조를 혁신하는 카타녹스(Katanox) 역시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들은 단순한 중개 플랫폼이 아닙니다. 영국 금융당국(FCA)의 라이선스를 받은 '규제된 핀테크 기업'입니다. 호텔과 여행 판매자를 직접 연결해 주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정산과 자금 흐름을 통제합니다. 기존 GDS 시스템이 떼어가던 막대한 수수료를 걷어내고 투명성을 심어주는 '금융 설계자' 역할을 자처한 것이죠.


결론: 화려함보다는 '단단함'을 봐야 할 때

시장을 분석하며 내린 결론은 명확합니다.

이제 투자자들과 시장은 "얼마나 많은 사용자를 모았는가(MAU)?"를 묻지 않습니다.

대신 "누가 금융 흐름을 통제하는가?", "누가 산업의 비효율을 제거해 마진을 남기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유니콘 기업들은 예전처럼 섹시하거나 화려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앱 아이콘조차 없을 수도 있죠.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화려한 호텔 로비보다, 그 아래서 묵묵히 돌아가는 보일러실과 자금의 파이프라인을 장악한 사람이 건물의 진짜 주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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