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확정의 진실: 한국 여행업계를 떠받치는 ‘가짜 예약’ 구조

예약이 가득 찬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숫자로 버티는 구조. 한국 여행업계의 ‘가라모객’은 편법이 아니라 하드블록 계약과 유통 구조가 만들어낸 생존 전략이다. 단기 실적은 지키지만 신뢰는 무너지고, 법적 리스크는 커진다. 정직하면 먼저 도태되는 시장에서, 이 구조를 깨는 방법은 과연 존재할까?

출발 확정의 진실: 한국 여행업계를 떠받치는 ‘가짜 예약’ 구조

모두가 알지만 말하지 않는 ‘가라모객’이라는 관행

한국 여행업계에는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꺼내지 않는 관행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가라모객’입니다. 겉으로 보면 예약이 어느 정도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원을 먼저 시스템에 입력해 두는 방식입니다. 흔히 ‘Fake Booking’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을 단순한 꼼수나 편법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국 여행 산업이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 온 구조적인 산물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한국 여행 시장은 매우 빠르게 성장해 왔습니다. 양적으로는 눈에 띄는 발전을 이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여행사·항공사·랜드사·소비자가 서로 복잡하게 얽힌 구조가 고착되어 왔습니다. 항공 좌석 계약 방식, 재고가 남으면 바로 손실이 되는 구조, 그리고 ‘출발 미정’을 불안해하는 소비자 심리가 맞물리면서 가라모객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습니다.

이제 가라모객은 일부 회사의 일탈이라기보다, 업계 전체가 암묵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생존 방식에 가깝습니다. 불편하지만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어버렸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구조가 만들어낸 ‘가짜 예약’ 시스템

가라모객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최소 출발 인원이 찬 것처럼 만들어 ‘출발 확정’ 상태를 먼저 띄우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잔여 좌석 2석” 같은 문구로 소비자의 조급함을 자극하는 방식입니다. 전자는 신뢰를 이용하고, 후자는 심리를 자극합니다.

이 과정은 여행사 ERP 시스템 안에서 비교적 정교하게 이루어집니다. 가명이나 차명을 입력하는 이른바 ‘데이터 세탁’을 거쳐 허수 예약을 만들고, 실제 예약이 들어오면 그 자리를 교체합니다. 최근에는 개인정보 이슈를 피하기 위해 성명과 연락처만으로 예약이 가능한 ‘가계약 모드’도 활용됩니다.

심지어 따이공(보따리상)의 여권 정보를 받아 인원을 채우는 변종 사례도 존재합니다. 상품 판매를 위한 정상적인 예약이라기보다, 실적과 계약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구조의 중심에는 항공권 계약 방식, 특히 하드블록 계약이 있습니다. 하드블록은 일정 좌석을 여행사가 미리 사두고, 판매 여부와 관계없이 100%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좌석이 비는 순간 손실이 확정됩니다.

성수기 좌석을 확보하려면 비수기 좌석까지 함께 사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어떻게든 출발 확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선택이라기보다는 구조적으로 강제된 행동에 가깝습니다.

여기에 항공사의 직판 강화, ‘출발 미정’을 꺼리는 소비자 심리까지 더해지면 가라모객은 사실상 생존 전략이 됩니다. 정직하게 “아직 예약이 없습니다”라고 표시하는 순간, 경쟁에서 바로 밀려나기 쉬운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단기 생존 논리가 만든 장기적 붕괴

가라모객은 단기적으로는 분명 효과가 있습니다. 예약 전환율을 높이고, 현금 흐름을 유지하며, 랜드사와의 협상에서도 일정한 우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당장의 숫자만 놓고 보면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대가는 분명해집니다. 실제 예약이 몰리면 오버부킹이 발생하고, 항공이나 호텔 등급이 하향됩니다. 출발 확정을 믿고 휴가를 맞춘 소비자가 출발 직전에 취소 통보를 받는 일도 반복됩니다.

조인 행사 과정에서는 가격 차별과 책임 소재 불분명이 생기고, 하드블록 페널티를 피하기 위한 땡처리는 시장 가격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법적 리스크도 더 이상 이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출발 여부가 불확실한 상품을 ‘출발 확정’으로 표기하는 것은 표시·광고법 위반 소지가 있고, 실제로 시정명령 사례도 존재합니다. 민사적으로는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는 판례가 늘고 있으며, 환불 지연이나 자금 유용이 발생하면 형사 책임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가라모객은 단기 실적을 지키기 위해 산업 전체의 신뢰를 조금씩 소모하는 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정직은 항상 패배한다

이 문제는 개별 여행사의 윤리 선언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시장 자체가 ‘죄수의 딜레마’ 구조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가라모객을 쓰는 상황에서 혼자만 정직해지면, 사이트에는 “예약 0명”이 그대로 보이고 소비자는 불안해서 이탈합니다. 반면 가라모객을 쓰는 경쟁사는 고객을 흡수합니다. 이 구조에서는 정직한 기업이 먼저 무너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해법은 반드시 산업 차원의 변화여야 합니다.

첫째, 기술적 투명성이 필요합니다. 실시간 예약 현황 API 공개나 블록체인 기반 예약 장부처럼, 데이터를 임의로 조작할 수 없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라모객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워집니다.

둘째, 상품 체질 개선이 필요합니다. 1인 출발 상품, 소그룹 상품, 노팁·노옵션 기반 프리미엄 상품처럼 가격과 구조를 현실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조건 인원을 채워야 하는’ 압박이 줄어듭니다.

셋째, 제도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출발 확정’으로 고지한 상품은 반드시 진행하도록 하는 책임 예약제와, 항공사의 하드블록 강매 관행을 개선하는 논의가 함께 가야 합니다.

가라모객은 결국 ‘가짜 숫자’로 유지되는 산업 구조의 상징입니다. 이제는 숫자를 부풀리는 방식이 아니라, 신뢰와 책임으로 경쟁하는 구조로 넘어가야 합니다.

투명성이 비용이 아니라 경쟁력이 되는 순간, 한국 여행 산업은 비로소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성장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