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업의 미래, 'MICE'에 달려있다: 단순 알선에서 '경험 설계자'로
"MICE 산업." 이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거대한 컨벤션 센터, 딱딱한 정장을 입은 사람들, 지루한 기업 회의 같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지 모릅니다. '굴뚝 없는 황금 산업'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솔직히 여행업을 하는 많은 분에게 MICE는 그저 '까다롭고 복잡한 대형 단체 손님' 정도로 여겨지진 않았나요?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거대한 흐름을 놓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MICE 산업과 여행업의 관계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조금은 도발적인 주장을 하려고 합니다. 이미 업계는 변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정책도, MICE 행사에 참여하는 참가자들의 요구도 달라졌습니다.
단순히 버스를 대절하고 호텔 방을 예약해 주던 '수배업자(Arranger)'의 시대는 저물고 있습니다. 이제 여행업은 MICE를 무대로 도시의 경험을 설계하는 '총괄 디자이너(Experience Designer)'로 거듭나야 합니다.
1. 숫자가 말해주는 진실: 우리는 '절반의 성공'에 취해 있었다
우선 데이터부터 보시죠. MICE 산업이 돈이 된다는 건 모두가 압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MICE 산업의 직접국내총생산(MDGDP)은 약 3조 5,528억 원에 달합니다. 생산유발효과는 5조 9천억 원이 넘고요. 엄청난 규모입니다.
하지만 이 숫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어쩌면 불편한) 진실이 보입니다.
이 3.5조 원 중 무려 68.5%, 약 2조 4,335억 원이 '국제회의(Conventions)'에서 나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한국의 MICE 산업은 정부 주도하에 '시설'과 '인프라'를 중심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부산 벡스코, 인천 송도컨벤시아 같은 멋진 컨벤션 센터를 짓고, 대규모 국제 학술대회나 공공 컨벤션을 유치하는 데 집중한 것이죠. 물론 이건 대단한 성과입니다. 부산 벡스코가 2년 4개월 만에 흑자를 낸 것은 전설적인 성공 사례죠.
하지만 MICE는 'M(회의)', 'I(포상관광)', 'C(컨벤션)', 'E(전시회)' 네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68.5%가 'C'에 몰려있다는 것은, 나머지 시장, 특히 여행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I(포상관광)'와 'E(전시회)' 부문은 상대적으로 덜 개발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논쟁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C'라는 큰 성공에 집중하는 동안, 더 큰 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I(포상관광)'라는 황금알을 놓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봅니다.
2. 정부 정책의 거대한 선회: "이제는 '지역'과 '콘텐츠'다"
그런데 최근, 이 흐름을 완전히 바꿀 게임 체인저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문화체육관광부의 「제5차 국제회의산업 육성 기본계획 (2024~2028)」입니다.
이 계획의 목표는 화려합니다. 2028년까지 국제회의 개최 건수 '세계 1위' 탈환, 외국인 참가자 '130만 명' 달성, 외화획득액 '30억 달러' 달성.
하지만 저는 이 숫자보다 더 중요한 '정책의 방향성'에 주목합니다.
정부의 전략이 '중앙 시설 투자'에서 '지역 상생'과 '미래 혁신'으로 완전히 선회했습니다.
정부도 깨달은 겁니다. 더 이상 멋진 건물만으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요. 이제 필요한 것은 그 도시만이 줄 수 있는 '고유한 콘텐츠'입니다.
두 가지 핵심 전략이 눈에 띕니다.
- 지역 시그니처 국제회의 육성: 각 지역의 전략 산업(IT, 의료, 한류 등)과 연계해 '한국판 다보스포럼'을 키우겠다는 겁니다. 전주에 MICE 단지를 만들고, 포항은 K-컨벤션을 육성합니다.
- K-컬처와 융합: MICE 참가자들에게 K-컬처 체험 관광을 제공하고, '코리아 유니크 베뉴(KUV)' 활용도를 높입니다. 대형 국제회의 VIP에겐 '공항 입국심사 패스트트랙'까지 도입한다고 하죠.
이건 여행업계에 엄청난 시그널입니다. '서울'이나 '부산'의 대형 PCO(전문회의기획업)하고만 일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겁니다. 이제는 '전주', '군산', '포항'의 지역 콘텐츠를 MICE와 엮어낼 수 있는 여행사가 시장을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라면 이 '지역 특화'라는 거대한 파도에 어떻게 올라타시겠습니까?
3. MICE 참가자, 그들은 누구인가: '가성비'가 아닌 '경험 가치'를 좇는 사람들
MICE 산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행사에 오는 '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MICE 참가자는 일반 관광객과 완전히 다릅니다. 이들은 대부분 높은 소득 수준을 가진 전문직 종사자들입니다. 비즈니스를 위해 왔지만, 체류 기간 중 제한된 시간을 쪼개 그 도시를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이들은 '가성비'를 찾지 않습니다.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와 '경험 가치'를 찾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이들의 요구는 더 명확해졌습니다. "나는 행사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를 방문하는 것이다."
단순히 행사가 끝나고 저녁에 쇼핑하는 'Bleisure(Business + Leisure)'를 넘어섭니다. 행사 자체가 그 도시의 문화를 반영하길 원합니다.
여행업은 이들의 동선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까요? 행사 전후(Pre/Post Tour)에 뻔한 시티투어 버스를 태우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들은 K-컬처, 음식, 예술이 결합된 '몰입형 고가치 투어'를 원합니다. 여기서 여행업의 역할이 달라집니다. MICE 주최 측인 PCO나 CVB(컨벤션뷰로)는 여행사를 '대규모 숙박/교통을 해결해 주는 하청업체'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사가 먼저 이들의 '경험 니즈'를 충족시킬 맞춤형 상품을 기획해 역제안한다면 어떨까요?
그 순간 여행사는 단순 '수배업자'에서 행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파트너'가 됩니다.
4. 여행업의 생존 전략: '경험 설계자'로의 진화
그렇다면 여행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세 가지 핵심 전략을 제안합니다.
첫째, '유니크 베뉴(KUV)'를 상품화하라.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코리아 유니크 베뉴(KUV)' 리스트를 보신 적 있나요? 박물관, 전통 한옥, 심지어 복합문화공간까지. 이곳은 그 자체로 '왜 한국인가?'에 대한 답을 줍니다.
이제 여행사는 MICE 고객에게 5성급 호텔의 뻔한 연회장을 제안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대신 '국립중앙박물관에서의 특별한 만찬', '한국의집에서 즐기는 궁중 연회'를 기획해야 합니다.
이는 'I(포상관광)' 시장을 공략할 최고의 무기입니다. 특히 '섬 MICE'처럼 프라이빗하고 독점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글로벌 기업들의 하이엔드 인센티브 투어 수요를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둘째, 'BTMS'를 단순 출장 관리가 아닌 'MICE 플랫폼'으로 진화시켜라.
많은 대형 여행사가 'BTMS(Business Travel Management System)', 즉 기업 출장 관리 시스템을 운영합니다. 하나투어비즈니스가 대표적이죠.

지금까지 이 시스템은 항공권, 숙박을 '효율적으로 예약'하고 '비용을 관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BTMS가 여행사의 가장 강력한 'MICE Tech'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GW퍼시픽이라는 MICE 기업의 사례를 보시죠. 이들은 클라우드 기반의 '의전/수송 관리 도구'를 개발해 2023년 세계 바이오 서밋을 성공적으로 치렀습니다. 이 작은 성공을 발판 삼아, 이제 이 도구를 참가자 등록, 숙박, 주변 관광 정보까지 연계하는 '참가자 호스피탈리티 관리 솔루션'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BTMS도 마찬가지입니다. 축적된 기업 출장 데이터를 기반으로, MICE 참가자의 등록부터 행사 중 맞춤형 관광 추천, VIP 의전까지 총괄하는 AI 기반 솔루션으로 진화해야 합니다.
셋째, '지속가능성(ESG)'을 패키지에 녹여내라.
"ESG가 MICE랑 무슨 상관이야?"라고 생각하신다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서울시는 이미 MICE 행사 지원 기준에 '탄소저감률', '사회공헌도' 등을 반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글로벌 기업들은 ESG를 준수하지 않는 행사에는 참여 자체를 꺼립니다.
이제 여행업은 '지속가능한 MICE 패키지'를 개발해야 합니다. 저탄소 교통수단(기차, 전기 버스)을 제안하고, 지역사회 공헌 활동(CSR)을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며, 친환경 숙박 시설과 연계해야 합니다.
당신의 상품 포트폴리오에 '지속가능한 MICE 패키지'가 준비되어 있습니까? 이것은 비용이 아니라, 글로벌 MICE를 유치하기 위한 필수적인 '투자'입니다.
결론: 당신은 '수배업자'입니까, '설계자'입니까?
MICE 시장은 변하고 있습니다. 정부 정책은 '시설'에서 '콘텐츠'로, '중앙'에서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MICE 참가자는 '가성비'가 아닌 '경험 가치'를 요구합니다.
이 거대한 변화의 한복판에서, 여행업계는 중대한 기로에 섰습니다.
과거처럼 MICE를 그저 '복잡한 단체 손님'으로 여기고, 버스와 호텔을 '알선'해 주는 역할에 머무른다면, 결국 AI와 자동화 플랫폼에 자리를 내어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MICE를 '고부가가치 경험을 설계할 최고의 무대'로 인식한다면 어떨까요?
PCO와 CVB에게 지역의 유니크 베뉴와 K-컬처를 엮어 '경험 디자인 컨설팅'을 제공하는 파트너로 스스로를 격상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제5차 기본계획이 제시하는 '외화 30억 달러'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MICE는 여행업의 '미래'일까요, 아니면 그저 '복잡한 과거'일까요?
판단은, 그리고 실행은 이제 당신의 몫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