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배(毒杯)를 든 여행사, 홈쇼핑이라는 달콤한 지옥

요즘 TV 채널을 무심코 돌리다가 문득 서늘해질 때가 있다. 쇼호스트의 힘찬 멘트, 화사한 조명 아래 여행지를 환하게 소개하는 여행사 직원들의 미소. 그 얼굴 뒤에 무슨 마음이 숨어 있을까. 아마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갈 것이다. 나는 안다. 저 1시간짜리 ‘웃음’을 위해 지불한 1억 원의 무게를.

독배(毒杯)를 든 여행사, 홈쇼핑이라는 달콤한 지옥

코로나가 지나자 사람들은 미친 듯이 떠나기 시작했다. 가뭄 끝 단비 같은 회복기. 그런데 그 단비엔 독(毒)이 섞여 있었다. 업계의 오랜 중독, TV 홈쇼핑이라는 마약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 예전보다 더 지독하고 더 교활한 방식으로 우리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25년8월넷째주] 여행사 홈쇼핑 실적

팩트박스 — ‘1시간 1억’은 과장인가?

• 2025년 기준 방송비 8,500만~1억3,000만 원, 주말 황금 시간대는 1억3,000만 원 형성. 여기에 판매 연동 수수료 7~9%가 추가된다.


1. 비행기를 채워주는 악마의 속삭임, 그 달콤한 중독

이해는 한다. 방송 1시간에 50억 원의 주문이 터지고, 비행기 한 대 분량이 거뜬히 채워진다는데 그 유혹을 누가 뿌리치겠는가. 게다가 홈쇼핑의 주 시청층인 5060세대는 여행업계의 ‘큰손’, 그야말로 콘크리트 지지층이다. 스마트폰 앱으로 100원까지 비교하며 최저가를 뒤지는 우리와는 종족이 다른 소비자들. 이들에게 TV 화면 속 신뢰감 있는 쇼호스트의 한마디는 어느 온라인 후기보다 강력하다.

이번 구성, 정말 마지막입니다!”라는 외침. 그 순간 수화기를 드는 그들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방송일에 출근해야 하는 불쌍한 영혼은 홈쇼핑 내용엔 아무 관심이 없다.

더 치명적인 건 돈의 흐름이다. 이번 달 방송으로 들어온 예약금으로 월급을 주고, 사무실 임대료를 낸다. 그리고 그 돈으로 다음 달 방송비를 막는다. 이건 사업이 아니라 돌려막기다. 멈추는 순간 쓰러지는 자전거와 같다. 업계에선 이를 자조적으로 ‘홈쇼핑 돌려막기’라 부른다.

우리는 이미 2018년, 이 돌려막기 한복판에서 중소 여행사 줄도산을 겪었다. 그런데도 배우지 못했다. 노랑풍선1년에 400회 가까운 방송200억을 쏟아붓고, 모두투어166억을 태웠다. 상위 10개 업체가 전체 방송의 85%를 차지하는 그들만의 리그. 경쟁사가 하니 나도 안 할 수 없다. 다 같이 지옥으로 달려가는 폭주기관차에 올라탄 꼴이다.

얼마전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 실적은 얼마나 나왔을까?

팩트박스 — ‘대량 모객’의 실제 사례와 집중도

• 대형 편성에서 방송 1시간 수천 건 예약·수십억 주문이 빈번. 단기간 현금 유입 장치로 기능.

방송 집중도: 상위 10개 여행사가 전체 방송 약 85% 점유. 개별사 연간 100~400회, 누적 방송비 수백억.

[현업 셀프체크] 우리가 진짜 유혹당한 건 ‘수요’가 아니라 ‘면죄부’다

  • 방송 한 번으로 좌석이 꽉 차면, 우리는 상품 원가·CS·현지 품질 문제를 ‘다음 달’로 미룰 면죄부를 받는다. 그 사이 브랜드 신뢰는 이자까지 붙어 빠져나간다.
  • 편성표를 따냈다는 성과 슬라이드가 남고, CRM에는 고객이 남지 않는다. 이게 실적인가, 마약 기록표인가.
  • 오늘 우리가 결재한 건 매출인가, 미래의 추가징수(옵션·쇼핑) 의존 모델인가.
한 줄 자각: “좌석이 찼다”는 보고는 끝이 아니라, “무엇을 포기했는가” 목록의 시작이다.

2. 방송 한 번에 1억, 남는 건 상처와 불신뿐

문제는 이 ‘마약’의 비용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이다. 불과 12년 전 78천만 원이던 심야 방송비가 이제 1억을 우습게 넘본다. 주말 황금시간대 1억 3천만 원을 불러도 자리가 없다. CJ 같은 대형사는 아예 배짱 좋게 방송 단가를 10% 일괄 인상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팔리면 팔리는 대로 매출의 7~9% 수수료를 떼어간다. 여기에 영상 제작비, 인플루언서 섭외비, 콜센터 인력비까지 더하면? 결과는 뻔하다. 밑지는 장사다.

그 손해는 누가 메우는가. 답은 정해져 있다. ‘최저가’라는 미끼로 일단 소비자를 낚은 뒤, 현지에서 추가 비용을 ‘뽑아내는’ 구조. 우리는 이를 ‘선택관광’이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부른다.

예컨대 ‘24만 9천 원부터’라고 광고하는 필리핀 보홀 패키지의 선택관광 비용이 80만 원에 육박한다. 62만 원짜리 다낭 패키지80만 원 옵션이 붙는 코미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장면이 매번 재연된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현지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쇼핑, 아니 사실상의 바가지다.

이 기형적인 구조에서 모두가 피해자다. 소비자는 “사기당했다”며 배신감을 토하고, 현지 가이드는 본사의 압박손님 원성 사이에서 억지웃음을 판다. 그들도 모를 리 없다. 쇼핑센터와 옵션 투어로 손님의 주머니를 털지 않으면 본인 수입도, 랜드사 수익도 없다는 걸.

그런데 요즘 5060 고객은 예전 같지 않다. 인터넷 면세점·직구로 무장해 현지에서 지갑을 열지 않는다. 결국 서비스 질은 바닥을 치고, 여행사는 단기 매출엔 웃지만 장기적 브랜드 신뢰를 잃으며 운다. 거기에 ‘특별약관’이라는 덫까지 깔아 취소 시 표준약관보다 훨씬 높은 수수료를 물리는 건, 이제 애교에 가깝다.

팩트박스 — 소비자 피해의 ‘구조’가 숫자로 드러난다

특별약관 남용: 다수 판매 채널의 해외상품에서 특별약관(또는 혼용) 비중이 70% 안팎까지 관찰. 고령층 피해 두드러짐.

프리미엄화의 양면: 홈쇼핑은 초고가 장거리 패키지까지 편성·완판 사례 확대 → 편성 단가 인상과 동행.

[냉정한 계산기] 이익이 아니라 징수 설계로 맞추고 있지 않은가

  • 상품 표기가(₩P), 홈쇼핑 수수료율(r), 고정비(방송·제작·콜센터=F), 원가(₩C), 예약수(N)일 때
    • 총이익 = N * (P * (1 - r) - C) - F
    • 이 값이 음수라면 우리는 이미 현지 ‘옵션 ARPU’로 만회하겠다는 전제를 깔고 상품을 판 것이다.
  • 특별약관은 법적 장치가 아니라 구조적 적자 상품의 보험이 된다. 고객은 그 보험료를 취소 위약으로 낸다.
  • CS가 매일 듣는 말: “최저가라서 샀는데 왜 현지에서 또 내야 하죠?” — 이 질문에 답을 못하면 우리도 논리를 잃은 것이다.
한 줄 자각: 최저가 배너를 붙이는 순간, 가이드에게는 ‘판매 목표’가, 고객에게는 ‘추가지출 예정표’가 함께 배달된다.

3. 가장 비싼 대가, ‘데이터 주권’을 잃다

내가 보는 가장 치명적 대가는 따로 있다. 홈쇼핑은 여행사에 물고기를 잡아주지만, 낚시하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아니, 낚싯대마저 빼앗아 간다.

누가 우리 상품을 샀는지, 왜 샀는지, 어떤 여행을 꿈꾸는지. 이 소중한 고객 데이터를 여행사가 아닌 홈쇼핑사가 독차지한다. 여행사는 거대한 플랫폼에 상품을 납품하는 하청업체로 전락한다. 고객은 여행사의 고객이 아니라 홈쇼핑의 고객이 된다. 장기 관계? 로열티? 그런 단어는 사치다. 다음 시즌 기획은 데이터가 아니라 홈쇼핑 MD의 ‘감’과 ‘요청’에 의존할 뿐이다. 데이터 기반의 전략적 의사결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는 단순히 고객 정보를 잃는 차원이 아니다. 기업의 미래를 좌우할 ‘데이터 주권’을 통째로 상납하는 일이다.

팩트박스 — 플랫폼 리스크는 이미 ‘현실’

• 외부 커머스·딜 채널에서 정산 지연·미정산 사태가 반복 노출. 판매 대금 의존 시 현금흐름 리스크 직격.

• 첫 거래 데이터(식별자/선호/문의 로그)가 우리 DB가 아니라 플랫폼에 귀속되면, 리텐션·재구매 설계가 불가능.

[데이터 주권 리얼리티 체크] 지금 고객은 우리 고객인가, 편성 플랫폼의 고객인가

  • 첫 거래부터 고객 식별자·여행 성향·문의 로그가 우리 DB가 아닌 플랫폼 쪽으로 귀속된다면, 우리는 하청이다.
  • 다음 시즌 기획 회의에서 MD의 감(감각)이 슬라이드의 절반을 채운다면, 우리는 이미 인사이트를 아웃소싱했다.
  • 고객에게 “다음 여행도 우리에게”라고 말하고 싶다면, 우리 채널에서 ‘두 번째 행동(팔로우/구독/멤버십/설명회 신청)’을 설계했는지부터 점검하자.
한 줄 자각: CRM에 영수증(송장)만 남으면 우리는 공급자, 행동 데이터가 남으면 비즈니스 오너다.

4. 지옥문 앞에서 망설이는 이들에게: 대안은 있는가?

최근 몇몇 여행사가 라이브 커머스, 자체 앱을 부여잡고 분투한다. 갸륵하다. 하나투어 ‘하나LIVE’의 누적 성과 발표와, 모두투어 ‘Live M’의 매출 보고처럼, ‘자체 채널’이 성과를 만들고 있다는 신호는 분명하다. 물론 당장 홈쇼핑처럼 하룻밤에 수천 명을 모아주지 못한다. 수백만 원짜리 라이브수십~수백 명 모객이 고작인 현실. 홈쇼핑의 ‘규모’ 앞에선 초라해 보인다.

홈쇼핑에서 라이브커머스로… 여행업계 ‘직판 전환’ 늘려

그럼에도 희망은 이쪽에 있다. 채팅창에서 고객과 실시간 소통하고, 질문에 답하며 진짜 관계를 맺는다. 어떤 여행지를 좋아하고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데이터가 차곡차곡 쌓인다. ‘외부 플랫폼 정산 리스크’ 같은 변수를 피하고, 대면 설명회에선 북유럽 상품 설명회 60명 중 40명 현장 계약처럼 오프라인 전환력이 여전히 작동한다. 답답하고 더딜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스러운 과정이야말로 ‘내 고객’을 만들고 ‘내 브랜드’를 세우는 유일한 길이다. 쓰지만 몸에 좋은 약이다.

팩트박스 — 실행 체크리스트(분노를 실천으로 바꾸자)

  1. 홈쇼핑 편성 재정의: ‘저가 박리다매’ 대신 고부가/한정 좌석형으로 포지셔닝, 황금 시간대 올인 금지.
  2. 노옵션·노쇼핑 선언: 선택관광 강요 금지 조항을 랜드사 계약서에 삽입, 위반 시 정산 페널티 자동화.
  3. 자체 데이터 플라이휠: 라이브·자사몰·카카오 채널을 CRM 통합, 뷰어/문의/전환 로그를 다음 편성·상품기획에 피드백.
  4. 플랫폼 리스크 분산: 오픈마켓/소셜·홈쇼핑·직판의 정산 주기·채권 보호 조건을 비교해 채널 믹스 한도 설정.

[느리지만 남는 장사] 라이브·설명회·자사몰은 고객을 만드는 공장이다

  • 홈쇼핑 1분 편성비와 설명회 1회 비용을 나란히 놓고 보자. 즉시 모객은 전자가 크지만, 재구매·추천·리뷰 자산은 후자가 남긴다.
  • 라이브의 채팅창에서 얻는 반복 질문은 그 자체로 상품 리파인 백로그다. 이게 쌓이면 다음 편성·다음 시즌 협상력이 생긴다.
  • “오늘은 적어도 내 데이터가 남았다.” 이 문장을 KPI로 가져가면 의사결정이 달라진다.
한 줄 자각: 빠른 매출을 살 때마다, 느린 자산을 판다. 어느 날 은행 계좌는 채워졌는데, 금고는 비어 있다.

[우리의 공모(共謀)를 끝내기]  

  • 이 구조는 누군가의 횡포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결재와 타협이 겹겹이 쌓여 완성된 생태계다.
  •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가이드 멘트를, 모레의 CS 스크립트를, 내년의 브랜드 평판을 정한다.
  • 우리는 판매를 잘하는 조직이 될 것인가, 관계를 갖는 브랜드가 될 것인가.
한 줄 자각: ‘홈쇼핑 돌려막기’는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직무 습관이다.

결국 선택의 시간이다. 당장의 달콤한 독배를 들고 외부 플랫폼의 하청업체로 서서히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금단증상을 견디고 데이터 주권을 가진 건강한 체질로 거듭날 것인가.

제발, 그만 돌려막고 진짜 ‘우리 장사’를 시작하자.

이 글에 대한 Blind 여행사 라운지 댓글 모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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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올 것이 왔습니다. 정말 올 것이.” 한국 정부가 중국 단체 관광객(3인 이상)에게 한시적 무비자 입국(2025년 9월 29일~2026년 6월 30일)을 허용한 날, 인바운드 업계 현장에서 나왔던 말입니다. 코로나19 이후 길었던 침묵, 그리고 2017년 사드(THAAD) 배치 이후 굳게 닫혔던 한한령(限韓令)의 긴 문이 마침내 열리는 듯한 드라마틱한 순간이었죠.

By Dem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