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 TV가 꺼진 뒤, 진짜 여행이 시작됐다: 미디어 권력 이동과 여행의 미래
혹시 기억하시나요? 금요일 저녁이면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앉았던 그 시절을요. 화면 속에서 할배들이 루브르 박물관 앞을 거닐고, 크로아티아의 붉은 지붕 아래서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면, 다음 날 아침 여행사 전화통엔 불이 났습니다. "저기 TV에 나온 거랑 똑같은 코스로 예약해 주세요." 그땐 그게 여행의 정석이었고, 일종의 사회적 법칙이었습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TV는 단순한 가전제품이 아니었죠. 우리에게 "올해 휴가는 여기로 가야 해"라고 명령을 내리는 절대적인 '게이트키퍼(Gatekeeper)'였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최근에 TV 보고 여행지 정한 적 있으신가요?
아마 꽤 오래전 일일 겁니다. 저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최근 제 여행지 목록은 TV가 아니라 인스타그램 저장 목록이나 유튜브 구독함에서 나왔더군요. 세상이 변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조용하고, 무섭도록 빠르게 말이죠.
오늘은 제가 분석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디어 소비 지형의 지각변동이 어떻게 여행 산업의 판을 통째로 뒤엎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단순한 트렌드 변화가 아닙니다. 이건 권력의 이동입니다.
70%의 붕괴, 그리고 '제로 TV' 세대의 등장
"에이, 그래도 아직 TV 많이 보지 않나요?"
독자분들이 가장 많이 하시는 질문입니다. 맞아요. 우리 부모님 세대는 여전히 TV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데이터는 냉정합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2024 방송매체 이용행태조사>를 뜯어보니, 아주 충격적인 숫자가 눈에 띄더군요.
69.1%.
주 5일 이상 TV를 보는 사람의 비율이 드디어 70%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고요? 대한민국 국민 10명 중 3명은 이제 TV를 일상적으로 찾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더 놀라운 건 20대입니다. 20대 5명 중 1명(19.0%)은 아예 TV를 보지 않는 '제로 TV' 그룹입니다. 그들에게 TV는 '선택 사항'조차 아닌, 그냥 '불필요한 가구'가 되어버린 겁니다.
TV가 꺼진 자리는 무엇이 채웠을까요? 네,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스마트폰과 OTT죠. 특히 20대는 하루 평균 70분 이상을 OTT에 쏟아붓습니다. 과거 60분짜리 잘 짜인 다큐멘터리로 여행을 배우던 사람들이, 이제는 15초짜리 숏폼으로 여행의 '바이브(Vibe)'를 소비합니다. 정보 습득의 호흡이 짧아졌고, 감각적으로 변했습니다.
이 변화가 여행 산업에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이제 9시 뉴스나 주말 예능에 수억 원짜리 광고를 태우는 건, 허공에 돈을 뿌리는 것과 같다."
판타지의 종말, 하이퍼 리얼리즘의 시대
과거 TV 예능이 보여준 여행은 '판타지'였습니다. 연예인들이 반사판 조명을 받으며 맛있는 것만 먹고, 좋은 곳만 가는 여행. 우리는 그걸 보며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동경(Aspiration)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세는 정반대입니다. 유튜브를 켜보세요. 빠니보틀, 곽튜브, 원지.
이들의 여행은 어떤가요? 땀에 젖은 티셔츠, 바퀴벌레가 나오는 숙소, 사기꾼과의 실랑이, 그리고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정. 예전 방송국 PD들이라면 "이건 방송 사고야!"라며 편집했을 장면들이, 지금은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킬러 콘텐츠가 됩니다.
우리는 왜 이 '날것(Raw)'에 열광할까요? 저는 이것을 '대리 고생'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완벽하게 세팅된 TV 속 세상은 가짜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알아버렸거든요. 오히려 유튜버가 겪는 고생과 엉뚱한 모험 속에서 우리는 "그래, 여행은 원래 저런 예측 불허의 맛이지"라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내 옆집 형이나 동생 같은 사람이 겪는 진짜 리얼리티.
이 '하이퍼 리얼리즘(Hyper-Realism)'이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화려한 광고보다, 내가 믿는 유튜버가 "여기 진짜 힘들지만 좋네요"라고 툭 내뱉는 한마디가 더 강력한 구매 유발 요인이 된 것입니다.
권력의 역전: 방송국보다 돈 많은 개인?
여기서 재미있는 사건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여행 유튜버 빠니보틀이 방송인 노홍철과 함께 남극으로 떠난 프로젝트, 기억하시나요?
이게 왜 중요하냐고요? 그 비싼 남극행 비행기 표, 무려 수천만 원에 달하는 비용을 빠니보틀이 전액 사비로 냈기 때문입니다.
과거엔 어땠습니까. 연예인이 해외를 가려면 방송국 제작비나 여행사의 협찬이 필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개인 크리에이터가 방송국 뺨치는 자본력과 기획력을 가지고, 거꾸로 연예인을 섭외해서 여행을 떠납니다. 방송사들이 뒤늦게 이들 영상을 사다가 방영하는 촌극까지 벌어지죠.
권력 관계가 완전히 뒤집힌 겁니다.
이 권력 이동은 곧바로 '돈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여행사 하나투어가 축구 유튜버 '김진짜'와 만든 영국 축구 직관 패키지를 보세요. 699만 원. 웬만한 직장인 월급 두 달 치가 넘는 초고가 상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을까요? 순식간에 '완판'됐습니다.
마이리얼트립과 유튜버 원지가 만든 상품도 마찬가지였죠. 사람들은 이제 '하나투어'라는 브랜드를 보고 여행을 가는 게 아닙니다. '김진짜가 추천하는 루트', '원지가 기획한 여행'이라는 크리에이터의 신뢰 자본을 믿고 결제하는 겁니다. 기업의 브랜드보다 개인의 취향이 더 비싸게 팔리는 시대. 이것이 2025년 여행 산업의 현주소입니다.
나노 투어리즘(Nano Tourism): 여행이 조각나고 있다
"그럼 이제 어디가 뜨나요? 다음에 뜰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저는 난감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국민 여행지'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다낭 가자!", "오사카 가자!" 하면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이걸 매스 투어리즘(Mass Tourism)이라고 하죠.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누군가는 우즈베키스탄의 시골 마을로 가고, 누군가는 도쿄가 아니라 일본의 이름 모를 소도시 기차역으로 향합니다.
내년(2026년)의 키워드는 단연 '나노 투어리즘(Nano Tourism)'입니다.
여행의 단위가 나노 미터처럼 아주 미세하게 쪼개진다는 뜻입니다. "프랑스 여행 갈래"가 아닙니다. "파리 11구에 있는 그 베이커리에서 크루아상 먹으러 갈래." "슬램덩크 오프닝에 나온 가마쿠라 그 건널목에서 사진 찍으러 갈래."
여행의 목적이 국가나 도시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취향'과 '경험'으로 좁혀졌습니다. 이 흐름을 가속화한 건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였습니다. 강제된 고립 속에서 우리는 단체로 몰려다니는 것의 위험함을 배웠고, 혼자 혹은 소수로 내 취향에 집중하는 여행의 즐거움을 깨달았으니까요.
우리는 모두 여행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
글을 맺으며, 이 거대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여행 산업 종사자라면, 이제 '가성비 좋은 패키지'를 파는 건 그만둬야 할지도 모릅니다. 대신 고객의 아주 사소하고 은밀한 취향을 읽어내고, 그것을 실현해 줄 '마이크로 상품'을 기획해야겠죠. 생성형 AI가 "사람 없고 빵이 맛있는 일본 시골 마을"을 1초 만에 찾아주는 세상이니까요.
그리고 여행자인 우리에게도 변화는 기회입니다. 더 이상 TV가 정해준 정답을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이 다 가는 에펠탑 앞에서 인증샷을 찍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골목길에서 고양이와 노는 것이 최고의 여행이 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대중(Mass)은 사라졌습니다. 오직 개인(Individual)만 남았습니다.
미디어의 지각변동이 가져온 이 자유로운 파도를 타고, 당신은 어떤 '나노 여행'을 떠나시겠습니까? 이제 리모컨을 내려놓고, 당신만의 지도를 그릴 시간입니다.